『인덱스카드 인덱스 2』 서평
(1)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김동신이 작성한 인덱스카드들의 색인집이다. 김동신은 각 인덱스카드를 쓸 때 다음 규칙을 따른다. 각 인덱스카드에 번호를 붙일 때는 작성 순서라는 단 하나의 기준을 따른다. 각 인덱스카드에 적은 내용 가운데 신경 쓰이는 단어나 문구에 표시한다. 김동신은 이를 통해 만들어진 번호와 내용으로 인덱스를 만들었다. 『인덱스카드 인덱스 2』는 김동신이 작성한 인덱스카드들의 색인집의 두 번째 작업물이다. 2015년에 발행된 『인덱스카드 인덱스』 대비 405장이 늘어난 총 1306장의 인덱스카드를 범위로 하는 색인을 수록했으며, 소설가 정지돈이 인덱스를 자유롭게 이용해서 쓴 글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가 실려 있다.
(1-1) 『인덱스카드 인덱스』와 『인덱스카드 인덱스 2』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책의 크기다.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A4. 『인덱스카드 인덱스 2』는 그 절반인 A5 사이즈에 가깝다. 따라서 『인덱스카드 인덱스』에 실려 있던 색인의 색인(『인덱스카드 인덱스』는 중앙의 얇은 선을 기준으로 나뉘어 위로는 인덱스카드에 대한 인덱스를, 아래에는 인덱스카드에 대한 인덱스=『인덱스카드 인덱스』의 인덱스를 싣고 있다)이 없다.
(2)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김동신이 작성한 인덱스카드들의 색인 외에 두 편의 글 혹은 단어의 뭉치를 함께 품고 있다. 김동신은 박성용에게 인덱스카드에 관한 글을,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인덱스카드 인덱스』를 이용한 글을 의뢰하고 그 결과물을 책에 실었다. '묶이지 않은 종이 뭉치에 글을 쓰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박성용은 글쓰기를 위해 인덱스카드를 작성하는 글쓴이 자신의 실감과 인덱스 카드 혹은 이와 비슷한 원리로 글을 썼던 저명한 저자들(특히 독일의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의 사례를 섞어가면서, 생각을 심고 배양하는 화단으로서의 인덱스카드의 의미와 그 조각들을 구조화하여 질서를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를 말하고 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HTML과 자바스크립트를 이용해 『인덱스카드 인덱스』를 위한 '한글 로렘 입숨 생성기'를 제작했고 책에 실린 인덱스카드 표제어 8,325개를 데이터베이스 삼아 무작위로 생성된 단어의 뭉치에 '보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런 식이다. "타자된 글과 일반적 제약은 관습적 표현과 청소년기를 행복하게 보내는 법에서 수수함을 역동성의 비이성의 최악의 목표 설정과 1314년의 경험은 표현의 자유와 물질적 필연성과 탐험을 작업실유령과 로베르 그랑종의 영국 문학사 때문에..."
(3) 『인덱스카드 인덱스 2』에 실린 정지돈의 글은 어떤 맥락의 일부이면서도, 거미줄의 매듭 같은 분기점이 될 수 있으며, 새로운 맥락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인덱스카드의 의의를 설명하거나 작성자 외에는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는 인덱스카드의 표제어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정지돈이 최근에 꽂혀 있는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와 미디어 이론에서 본 읽기/쓰기의 변화와 포스트 휴먼 담론과 페미니즘과 존 케이지와 영향관계에 있지만 단순히 영향을 받았다는 모호한 표현으로는 회수되지 않는 글이다. 다만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와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텍스트를 대하는/이용하는 모종의 유사성을 감지할 수는 있는데, 정지돈이 자신의 글에서 사용하는 메멕스(memex)라는 용어가 하나의 단서가 된다. 메멕스는 메모리(memory)와 인덱스(index)를 합친 용어로 바네바 부시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한 달 전인 1945년 7월 《애틀랜틱 먼슬리》에 발표한 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에서 메멕스에 대해 처음 언급했고, 이는 하이퍼텍스트나 인터넷의 시초가 되는 개념이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는 12개의 메멕스로 이루어져 있지만 메멕스 단위가 아닌 『인덱스카드 인덱스 2』의 표제어와의 관계에 따라 분리 배치되었다. 44개의 조각으로 나뉜 글은 94쪽에서 시작해 36쪽에서 끝나며 8번째 조각은 63쪽과 219쪽과 224쪽에 반복 등장한다.
(3-1) 『인덱스카드 인덱스 2』 181쪽에는 정지돈의 이름과 1211, 1213이라는 숫자가 있다. 그것은 '정지돈'이라는 단어 또는 관련 글이 1211, 1213번 카드에 있다는 뜻으로 『인덱스카드 인덱스』가 출간된 이후에 기입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1211번 카드에는 김동신의 이름도 있는데(본인이 등장하는 유일한 인덱스카드다) 박성용과 민구홍 매뉴팩처링과 금정연과 안은별의 이름은 없다.
(4) 『인덱스카드 인덱스』의 서평을 쓴 안은별은 그러나 이 책은 내가 기존에 서평을 쓰던 방식으로 다루기 어려운 책이라고 썼다. 이 책의 중심 혹은 출발점이 되는 상단부의 표제어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분석하면 좋을까? (혹은 이를 통해 만나본 적 없는 김동신이라는 사람을 상상해볼까?) 인덱스카드에 관한 개관이자 글쓰기에 관한 아름다운 성찰인, 무엇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에서 기대하는 일반적인 약속에 따라 쓰인 박성용의 글을 요약하고 나의 체험과 생각을 덧붙여 볼까? (그렇다면 기존에 쓰던 서평과 가장 가까운 글이 될 터였다.) 기계의 결과물인 '보기'를 사람의 힘으로 재현하는 무모한 패러디에 도전하여 지면을 채우고 그 노력의 의미를 꾸며내 볼까? 어느 것도 마땅치 않았다. 글자로 이루어져 있으나 대부분은 '읽을 수 없는' 이 책의 서평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다른 서평은 어떻게 썼던 걸까? 어떤 노력을 거쳐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나? 무엇이 되어야 하는 글이었나? 그리하여 『인덱스카드 인덱스』(에 대한 서평쓰기)는 난데없이 내게 서평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만들었다.
(5) 『인덱스카드 인덱스 2』의 서평을 쓰기 위해 나는 이 책의 안팎에 존재하는 텍스트들을 검토하며 내가 새롭게 보탤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성용과 민구홍 매뉴팩처링과 안은별과 정지돈과 김동신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작업들을 벌써 했다. 그것도 나보다 훨씬 잘. 그런데 내가 같은 형식을 반복할 필요가 있나. 거기에 무슨 재미가 있나. 내게는 남들이 해놓은 작업을 존중하거나 무시하는 척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나 자신의 언어로(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번역'해서 다시 늘어놓는 재능이 없다. 그것이 내가 위의 항목들을(하위항목을 제외하고) 그들의 텍스트로 채운 이유다. 나는 그들의 텍스트를 마음대로 자르고 수정하고 붙였다. 다만 (3)에서 약간의 첨언이 불가피했다. 정지돈의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에 대해 내가 인용할 수 있는 남의 작업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문제인데, 내 태도와 《인덱스카드 인덱스》 연작이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럼?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하나는 이 글을 청탁 받는 순간 이런 상황을 충분히(지나칠 정도로) 예상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로 했다는 것. 나는 그 이유를 말할 생각이다.
(6) 『인덱스카드 인덱스』는 내 책장에 있다. 언제 어디서 왜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덱스카드 인덱스』 서평에는 내 이름이 있다. 안은별은 내 문장을 인용하며 친절히 출처를 밝혀놓았다. 『인덱스카드 인덱스 2』 인덱스에는 내 이름(색인)이 없다. 대신 내 이름(색인 아닌)과 사진이 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의 메멕스 13에서 정지돈은 내 이름을 언급하며 먼 곳을 바라보는 개처럼 나온 내 사진을 삽입했다. 만약 당신이 더북소사이어티 홈페이지에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바로 위에 있는 얼빠진 남자의 사진을 보았을 거다.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7) 『인덱스카드 인덱스』라는 제목에서 먼저 나는 이승훈을 떠올린다. 이승훈은 모더니즘 시인이자 국문과 교수(정년퇴임)다. 나는 그에게 퍼스와 바르트(763 1077 1209)를 배웠고 그를 경유해 퍼스와 바르트를 생각한다. 퍼스는 기호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지표=인덱스는 대상과의 인접성을 가지고 지시작용을 한다. 우리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보고 개나 새나 인간이 지나갔다는 것을,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어딘가에 화재가 났다는 것을 안다. 일종의 환유. 바르트는 퍼스의 인덱스 개념을 사진으로 확장시킨다. 사진에서 이미지는 단순한 코드나 상징 관계가 아니라 규명할 수 없는 어떤 심층적 실체의 지표로서 나타난다, 고 바르트는 말한다. 사진은 무언가를 재현하는 그림(도상)도 아니고 무언가를 전달하는 상징도 아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다만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음을 안다. 현실의 흔적. 혹은 현실의 자국. 그때 사진은 찍혀진 자국 외에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상징적 함축성도 지니지 않는 절대적 지시만을 갖는 사진-인덱스(photo index)가 된다. 사진이 말하는 것은 한때 (무엇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없다. 부재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비어 있는 의미 공간으로서의 사진.
(7-1) 1977년 10월 25일 롤랑 바르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 다음 날부터 바르트는 이도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일기는 2년 뒤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바르트는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색인 카드에 어머니에 관한 기억들을 적었다. 바르트가 책상 위 작은 상자에 모아두었던 카드는 1980년 바르트가 죽은 뒤 현대저작물 기록보존소(IMEC)로 옮겨졌고, 2009년 《애도 일기》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8) 《인덱스카드 인덱스》 연작에는 의미가 부재한다. 『인덱스카드 인덱스』의 인덱스가 지시하는 인덱스카드를 독자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해석은 불가능하고, 다만 인덱스를 통해 인덱스카드의 존재를, 카드에 기입된 텍스트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인덱스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진은 과잉된—그러나 언어화할 수 없는—의미로 보는 이의 망막을 찌른다. 바르트의 풍크툼(punctum). 오해하면 안 된다. 사진이 본래 지니고 있던 고유의 의미가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보는 이의 눈이고 그의 경험이며 그의 무의식이다. 바르트가 환유적 확장의 힘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 보는 이에 의해 다양한 의미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거다. 『인덱스카드 인덱스』에도 같은 (적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걸까?
(8-1) 부재는 지속되고, 나는 그것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부재를 조작하려 한다. 시간의 뒤틀림을 왔다갔다하는 행동으로 변형시키거나, 리듬을 산출하거나, 언어의 장면을 열고자 한다(언어는 부재에서 태어난다. 아이는 실패를 가지고 장난한다. 어머니의 외출과 귀가를 흉내내며 실패를 던졌다 붙잡았다 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창출된 것이다). 부재는 하나의 능동적인 실천, 분망함(affairement)(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이 된다. 다양한 역할(의혹, 비난, 욕망, 우울)이 등장하는 허구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런 언어의 연출은 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아이가 어머니의 부재를 여전히 믿고 있는 시간과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시간 사이에는 극히 짧은 차이밖에 없다고 한다. 부재를 조작하는 것, 그것은 이 순간을 연장하려는, 그리하여 그 사람이 냉혹하게도 부재에서 죽음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르는 순간을 되도록 오래 늦추려는 것이다. (바르트, 《사랑의 단상》)
(9) 『인덱스카드 인덱스 2』 129쪽에는 "실용주의(662)"가 등장한다. 나는 물론 662번 인덱스카드를 볼 수 없고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실용주의 철학자 로티의 이론이 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비록 로티의 이름은 이 책에 등장하지 않지만.) 왜냐하면 지금 내게는 로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1990년 7월 케임브리지 대학의 클레어 홀에서 열린 태너 강연회. 로티는 움베르트 에코가 텍스트가 진정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조장한다며 빈정거린다. 주어진 텍스트가 진정 뭔가를 말하고 있고 한 방식을 엄격히 적용하면 드러나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어떤 실체가 진정 그 자체로는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만큼이나 해롭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해석하고, 알고, 그 본질을 꿰뚫는다는 것 등은 모두 그것을 작용시키는 어떤 과정을 기술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주의적인 냄새가 풍기는 해석이라는 단어보다는 이용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훨씬 유익하고 정신건강에 좋다. 독자는 텍스트를 얼마든지 즐겁게 이용할 수 있다. 텍스트 읽기란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들, 다른 사람들, 압도적 관심사들, 정보들 등에 비추어 읽고, 그러고 나서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나는 로티에게 동의한다. 그건 가볍고 실용적이며 발랄한 (텍스트 읽기에서 발생하는) 풍크툼이다.
(10) 『인덱스카드 인덱스 2』 서평을 쓰기로 하고 서평을 쓰지 않는 동안 나는 작업실을 청소했다. 지난 연말 건물 3층에서 불이 났고, 5층에 있는 작업실까지 연기와 분진이 날아왔다. 책장의 책들을 모두 빼고 닦고 다시 넣어야 했다. 밖에 있어서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설마 5층까지 피해가 있겠어, 방심하다가 검게 그을린 현관문을 보고 피해를 직감하긴 했다). 정리를 하는 김에 책장을 새로 사 모든 책들의 책등이 보이게 새로 꽂으며 나는 그 책들이 나의 인덱스카드 같다고 생각했다. 제목과 저자, 출판사, 책등의 색깔이 내게는 인덱스라고. 따라서 그것들을 다시 꽂는 일은 박스 가득 넣어둔 인덱스카드를 정리하는 일과 비슷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글쎄. 나는 다만 『인덱스카드 인덱스』가 내게 촉발한 환유적 확장을 기록할 따름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인덱스카드 인덱스』와 그 안팎에 있는 텍스트를 이용했고 그래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