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요 요 요. 베리 화이트의 낭송처럼 그는 그토록 무거운 밤보다도 더 깊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지하철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네 『핌 오렌지빛이랄지』(17p) 23/12/22

41.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본다. 『야만적인 앨리스씨』(7p) 23/12/6 32

40. 죽음이 짐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죽음 또한 망각의 하인에 불과하니, 비록 육신은 모래와 먼지로 산산이 풍화된다고 하더라도 초합금 사리탑처럼 오롯하게 치솟는 짐의 지성은 시간의 압제를 넘어 기필코 너희가 저지른 배덕을 처단하고 마는 것이다! 짐의 코기토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짐은 위대한 기억의 무량수전을 탐사하며 저자 코너에 너희의 얼굴이 게재된 문서를 꺼내 참혹하게 훼손할 것이다. 짐의 머릿속이라는 방대한 평행 우주적 아카이브에서 너희에 관련한 기록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것이다. 너희는 짐의 영토에서 추방되었으니 이제 누구의 기억에도 정주하지 못하는 불쌍한 몽유병자들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무섭지? 벌써 후회가 되지? 짐이 구사하는 기절초풍할 말씀의 장풍을 받아라! 이얍! 전율하라! 혼절하라! 혼비백산하여 쓰러져라! 껄껄!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57p) 23/11/22

39. 설거지에 유용한 사람: (액셀 페달을 힘껏 밟으며) 내게는 면허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보라고! 자격등들이 이 세상을 얼마나 따분하게 만들었는지! 인간은 헐벗은 자유 속에서야 자신이 이 질식할 것 같은 커뮤니케이션 체계와 단속적으로 차단된 문법의 시공간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깨달음, 날것의 세상이란 오로지 실험되는 것일 뿐 닭장처럼 억압적인 사기극의 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독가스를 살포하라! 너도 내 포켓몬이 돼라! 인간의 실존이란 세계에 삽입된 비문인 것이다! 나는 바벨과 한바탕 전쟁을 벌일 계획이다! 시인이란 도시의 게릴라다! 작가란 사이코패스 산책자다! 새로운 시대의 인간이란 고아가 된 권력의 찬탈자다! 나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싸대기를 날리고 북미정상회담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이다! 세계의 중심에 근사한 암적색 침팬지들의 연옥을 열어젖힐 것라는 얘기다! 으하하!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45p) 23/11/22

38. 토토: (오토를 싫어하며) 설거지를 그렇게 하찮게 여긴다면 자기의 인생은 허상이나 다름이 없어. 내 생각에 사랑이란 자기가 먹은 접시를 스스로 설거지하는 거야. 그러한 행동이 차츰 누적되는 거지.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배려라고 부르는 최소한의 애정이라는 거고. 자기는 자기의 소년을 돌보기 위해 설거지를 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 소년이 대체 어디 있냐는 거야. 제발 한 대 쥐어박았으면 좋겠다고. 끝없는 불화를 획책한 원인이 바로 설거지라는 거야. 설거지가 악의 근원이라는 거야. 말싸움은 사랑을 파국으로 데려가는 법이야. 설거지로부터 이 지루한 말싸움이 시작되었고, 설거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소년이 아니라 바로 자기라는 거야! 이 언어의 마구니들이 쏟아져 나온 블랙홀이 폐허가 된 싱크대고, 자기의 근육은 책임 소재를 자각하지도 못하고 열심히 넘실거리며 내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거야! 내 사랑은 설거지라는 고난과 근육이라는 근접성 사이에서 정처를 모르고 방황하고, 찢어져 흩날리고, 속이 터져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거야!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40-41p) 23/11/22

37. 토토: (로선을 바르며)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은 없어. 자기의 근육은 내 사랑으로 진정한 근육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거야. 내 손길이 없었더라면 자기의 근육은 먹을 수 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지. 사람은 원래 각자도생하는 거야. 단지 고깃덩어리가 맛있는 햄버거나 탕수육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그것이 바로 저마다 사로잡힌 고독에 출구가 열리는 기적적인 순간이라고 하더라. 자기는 자기의 가여운 소년을 특권이나 부적처럼 숭배하는 것 같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런 내면의 갓난쟁이들을 지니고 있단 말이야. 나도 그렇고……. 내 경우엔 시냇가에 멍하니 하염없이 떠내려가는 종이배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 아니, 이만 됐고, 자기도 이제 내면의 소년을 놓아주도록 해. 언제까지 제 발등만 내려다보고 있을 거냐고. 단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일 수도 있어. 연속성 속으로 나아가 세계와 어울리느냐, 불연속성 속에서 질질 짜면서 유기되느냐. 물론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소년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근육 때문이야. 또 보기 좋은 떡은 시끄럽게 떠들지 않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고.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38-39p) 23/11/22

36. 토토: (주머니 속의 색종이를 뿌리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그런 유형의 자족적인 활동이야. 예술을 위한 예술, 근육을 위한 근육, 슬픔을 위한 슬픔. 실천적이지 못한 근육은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당장 설거지를 하겠다고 약속해. 설거지만 깔끔하게 하고 나면 용서를 해주겠다는 말이야. 세상은 전쟁이야. 현실을 좀 자각하기를 바라. 지금도 현실이라는 열차가 무자비하게 전진하고 있는 거야. 실성한 사람들을 다 내팽개치고 가는 현실이라는 열차가. 물론 나는 열차에 탑승했고, 기꺼이 자기 같은 사람을 열차에 태울 용의도 있어. 삶에 치여서 지내면 내면의 상처 같은 것은 한낱 미미한 얼룩에 지나지 않아. 자기는 나랑 같이 객차에 탑승해 내 침대가 되면 그걸로 족한 거야. 사람은 누구나 역할을 하고 살아야 해. 그래야 자존감도 상승하는 법이지. 자학적인 감정들은 착각, 자기 연민의 악무한을 불러들이는 가장 멍청한 도취일 뿐이야. 자기의 근육은 내 손길이 다녀가는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면 되는거야.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37p) 23/11/22

35. 그의 삶과 관련 없었던 타인들은 대개 장막 뒤편에 표백된 채로 존재하다 어느 순간 그가 점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삶의 무대를 향해 뛰어서 올라왔다. 그러곤 난폭하게 무대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그가 외면하고 있었던 소외나 불안의 테마들을 되풀이해 패러디했다. 감겨드는 나사처럼, 쓰러지지 않는 팽이처럼,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외로움이 희극에, 수다스러운 유희에, 슬랩스틱에, 반복된 행위의 무감한 연쇄에 가까워질 때까지 말이다. 달걀의 여백은 얼굴이 발생하기 직전의 잠재적인 캔버스였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다시 작게 떴다. 아둔하고 시대착오적인 광학 기계를 작동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양손을 스스로 묶어버린 채 이 무대가 자신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준비된 극장인 것처럼 행세했다. 단상에서 퇴장해 객석에 앉아, 그들이 그저 순간의 그림자들은 아닌지, 자신이 극장의 주소를 잘못 찾아오지 않았는지만을 여러 차례 의심하고 연연했다는 말이다. 확실한 것은 가면을 쓴 달걀들이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대에 대한 권리, 배역을 요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불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33-34p) 23/11/22

34. 광학 기계의 눈부신 무덤에서 버젓하게 생환해 그의 눈동자 속으로 다트처럼 박히는 햇볕의 정확한 굴절, 소진된 출처의 미래에서 학살당하는 분신들, 프릴처럼 겹겹이 에워싸이는 가시성의 장막들, 바스러진 조각들마다 크림케이크처럼 매달리는 하얀 포말들, 시간의 궤멸을 쓸어 담는 싸리비의 단조로운 움직임, 시끄럽게 과열된 금속성의 소음들, 뾰족하고 서늘한 부재의 꼬챙이들 사이에서, 산산이 흩어진 잔해들의 역류 속을 민무늬 뱀처럼 배회하며, 다채롭게 빛나는 폐허의 레이어를 신원 미상의 덤불처럼 걷어내고, 가끔은 충분히 부서지지 않은 가면을 구둣발로 세차게 짓밟기도 하면서 그는 오전 내내 청소를 했다.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28p) 23/11/22

33. 내 지팡이는 대개 물컹한 해면동물의 아가리 같은 캄캄한 어둠 속을 배회하지만 사람을 발견해 겨눌 땐 길쭉하고 무서운 엽총이 된다오. 비가 쏟아지면 펼쳐 두를 수 있는 피난처가 되며, 자네처럼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나면 사랑이 성사되기 좋을 휴대용 텐트로 변하지. 사실 공적 삶과 사적 삶이란 분위기의 배치에 달려 있을 뿐이라오. 상황이 달라졌다면 자네 또한 얼마든지 내게 반했을지 몰라. 그랬다면 우리 사이에도 뭔가 은밀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겠소. 사랑은 자격을 요구하지 않소이다. 누구나 지쳐버린 마음이 누워 칭얼거릴 수 있는 값싼 요람이 필요한 법이잖소. 이번 만남은 단지 때와 장소가 어긋났다고 말하는 편이 적당하겠지. 그럼 다음을 기약합시다. 안녕히 가시구려. 허깨비, 또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불시착에 가까운 방식으로 출몰해 되바라진 소리를 내뱉는 이러한 세계는 처음부터 시작하지를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가면의 공방」, 『클로이의 무지개』(13p) 23/11/22

32. "내 친구들, 조문객들이 이상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거나 장례 예절을 잘 지키지 않더라도 부디 눈총을 주거나 나무라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살면서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았고, 힘든 일을 너무 많이 보았고,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누가 치마를 입었든 머리를 밀었든 각자 자유일테니까. 내 영전 앞에 담배를 내려놓고 술을 마시고 신나게 웃더라도 내버려두십시오. 제발 그대로 두십시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겁니다. 그리고 나는 담배를 영전 앞에 내려주는 친구들에게 고마워할 겁니다. 발인 날 누가 관을 들든,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까지 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하게 해주세요. 아무도 그걸 원치 않는다면, 그냥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사람들마다 죽음을 마주할 때 대응하는 방식은 다른 거니까.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만약에, 혹시라도 내가 자연사나 사고사가 아닌 방식으로 죽는다면, 사람들이 내게 화를 낸다고 함께 화내지 마세요. 그들에겐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살아남고 싶었고 그래서 평생 모든 것을 회피하며 살았으니, 죽음 앞에서는 당당하길 바랍니다." 「유언장 혹은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89-91p) 23/11/22 41

31. 외국에서 머물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제까지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왼쪽에 자주 가던 카페가 있고 그대로 걷다 보면 공원이 나왔는데 왜 오늘은 자다 깨서 문을 열고 나가 걸어도 공원이 안 나오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그것이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잠을 자고 깨어나고 짧은 순간 여기가 어디인지 정할 수 없는 장면에 머물고 있다. 나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내가 아는 최고의 길치이자 방향치'인데 그래서인지 꿈에서도 나에게 길을 알려 주거나 약도를 그려 주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 사람들이 그려 주는 약도는 나는 이곳에 있는데 문을 열고 나가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공원이라거나 그랬고 사람들은 그것을 세심하게 그려서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것을 늘 소중히 받았다. 약도를 손에 품고 나는 길을 걸어갔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22p) 23/11/22

30. 커피색 벽지로 둘러진 카페 창문가에 앉아 있는 에릭이 갓 구워져 나온 빵을 눈앞에 두고선 냅킨으로 손을 닦고 있다. 방금 20번가의 코너를 돌아 이 거리로 들어선 루벤은 예의 웃는 상의 얼굴로 그가 지금 산책시키고 있는 개보다 더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대학교수처럼 옷을 입은 실제로 대학교수이기도 한 제이슨이 그가 새로 기획한 개인전이 미술 관계자들에게서 철저한 무관심에 시달리고 있는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택시에서 내리는데 내 상상에서 찰스 로이드는 노숙자다. 그는 처음부터 거리에 색소폰을 베고 누워 잠들어 있었다. 찰스 로이드에 관해선 이상하게 그 모습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드디어 거리에 모여든 그들은 서로를 지나친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며 서로를 지나치기, 이것이 내가 짐작한 이들의 유일한 약속이며,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이들이 결코 의지하지 않는 우연이다. 내가 브루클린의 상상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곳이 내가 미국에서 가 본 유일한 곳이기 때문인 것과 비슷하게 사실은 그들도 연주할 때 각자의 표상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단지 감각으로 나 말고 누군가 주위에 더 있다는 것을 느끼며 굳이 다른 이에게 보여지겠다는 마음이 없는 혼자만의 미소로 서로를 지나치면서, 어쩌면 그들은 동시에 서울과 도쿄, 베를린에 있을 수도 있다. 공연 영상을 찾아보게 된다면 연주에 녹아들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릴 이 글처럼 웬일로 뭔가 즐거운 일이 떠올라 그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 시작도 지나치는 게 좋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22p) 23/11/22

29.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도시가 차분하고 거리는 안전하고, 이제 오밤중에 걸어 다니지 않아요. 새벽 한 두시 면 곤히 잠들었죠. 보호받을 필요가 없어요. 난폭한 개가 날 지킬 필요가 없어요. 난 아폴로가 누구에게 짖거나 으르렁대야 된다고 느끼는 게 싫어요. 아폴로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어디 가든 아폴로가 우리가 아주 안전하다고 느끼면 좋겠어요. 난 아폴로가 내 총이 되길 바라지 않아요. 아폴로가 얌전하게 따라오면 좋겠어요. 행복한 개가 되면 좋겠어요. 개가 주인을 그리워하던데요, 라고 위층 주민이 말해요. 퇴근하다가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와 마주쳤어요. 말인즉, 아폴로가 또 울어요. 아폴로는 당신을 잊어야 해요. 당신을 잊고 날 사랑해야 해요. 꼭 그렇게 되어야 해요. 『친구』(108p) 23/11/08

28. 어떤 글도 헛수고는 아닙니다, 라고 당신은 말하곤 했죠.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글을 던져 버리더라도 작가로서 늘 배우는 게 있거든요. 내가 배운 건 이거예요: 시몬 베유가 옳았어요. 상상 속의 악령은 로맨틱하고 다양하다. 현실 속 악령은 음울하고 단조롭고 건조하고 지루하다. 『친구』(94p) 23/11/08

27. 또 다들 돈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 같았어. 그게 이해되지 않았지. 세상에 돈 때문에 작가가 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처음 들은 글쓰기 강의에서 선생님은 말했어. 여러분이 작가가 되려거든 맨 먼저 할 일은 빈곤 서약을 하는 겁니다. 강의실에서 누구 하나 눈도 깜빡이지 않았지. 내가 아는 작가는 모두—당시 아는 사람은 다 작가였지—병적으로 우울한 상태 같았어. 다들 누가 뭘 얻었는지, 누가 버림받았는지, 문학계가 얼마나 끔찍하게 불공평한지 꾸준히 들춰냈지. 몹시 혼란스러웠어. 왜 꼭 이래야 될까? 왜 남자들은 모두 교만하고 왜 성범죄자가 그렇게 많을까? 왜 여자들은 다들 그렇게 화나고 우울할까? 사실 모두 안쓰럽게 느껴졌지. 낭독회에 참석하면 저자 때문에 당황스럽지 않은 때가 없었어. 저 자리에 있고 싶으냐고 자신에게 물었더니, 아이고 됐거든, 이란 솔직한 대답이 나왔지. 또 나만 그런 게 아니었지. 나머지 청중들에게도 그 기류가, 똑같이 불편함이 감지되었지.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 보들레르가 예술은 매춘이라고 말했을 때 바로 이런 걸 뜻했구나. 『친구』(90p) 23/11/08

26. 작가들은 밀로시를 즐겨 인용하죠. 어느 집안에 작가가 태어나면 그 집안은 끝난 거다. 내가 소설에서 어머니를 다루자 어머니는 날 용서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토니 모리슨은 실제 인물에 기초한 등장인물을 저작권 침해로 칭했어요. 그녀는 말하죠. 사람은 자기 인생을 소유한다. 타인이 그것을 소설에 이용하면 안 된다. 『친구』(72p) 23/11/08

25. 그는 서점에 있는 자기 책들을 볼 때마다 책임을 모면하고 넘어갔다고 느꼈다, 라고 존 업다이크는 말했죠. 그는 좋은 사람은 작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피력했어요. 자기 의심이라는 문제. 수치심이라는 문제. 자기혐오라는 문제. 당신은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집필 중에 글에 넌더리가 나서 그만두기로 결정했는데 나중에 나도 모르게 거부할 수 없게 끌려들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지. 침 뱉은 우물물을 다시 먹는 꼴일세. 『친구』(70p) 23/11/08

24. 강의 노트. 모든 작가는 괴물이다. 앙리 드 몽테를랑. 작가는 늘 누군가 팔아넘긴다. (글쓰기는) 공격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행위…… 은밀한 괴롭힘의 전술. 조앤 디디온 모든 저널리스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 안다. 재닛 맬컴 밥값을 하는 작가라면, 글을 배우느라 시달린 이들에게 한줌의 문학도 상당한 보상이라는 것을 안다. 레베카 웨스트 문학의 악덕에는 치료제가 없는 것 같다. 감염된 이들은 거기서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 W.G.제발트 『친구』(69-70p) 23/11/08

23. 당신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의를 시작했어요. 당신과 친구가 된 제자는 나 혼자가 아니었고, 나나 당신이나 같은 강의에서 1번 부인을 만났지요. 당신은 학과의 최연소 교수로, 학과의 재원이자 로미오였어요. 당신은 강의실에서 사랑을 금지시키려고 한들 헛수고라고 느꼈죠. 훌륭한 선생은 유혹자라고 말했고, 누군가의 마음을 매정하게 거절한 적도 있겠죠. 내가 당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한다고 흥분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어요. 나 자신이 지식을 갈망한다는 것과 당신이 지식을 전달할 능력의 소유자란 사실을 알았어요. 『친구』(30p) 23/11/08 15

22. "우리가 특정한 종류의 이론적 언어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멍청하다고 넘겨짚은 거야." 지난해 파리에서 시인 앨리스 노틀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한나 윌케는 평생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죠. 예술이 지진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그 프로젝트가 실패에 부딪혔을 때 실패 역시 그 주제가 되어야 하죠. 딕, 그것이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에요. 『아이 러브 딕』(344p) 23/11/07

21. 그 많은 편지 중 하나에 나는 이렇게 썼다. "딕에게, 지금 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랍니다. 거의 묘사되지 않으니까요." 『아이 러브 딕』(329p) 23/11/07

20. 그해 여름 나는 딕이 나를 '마조히스트'로 오해한 일과 내 영화에 대한 존 핸하르트의 평가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두 남자 모두 내 작품이 혐오스럽지만 한편으론 '지적'이고 '용감'하다고 인정했다. 그 연결고리를 이해할수 있다면 특정 종류의 여성 예술에 대해 비평가들이 오독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이 러브 딕』(328p) 23/11/07

19. 재니스 조플린의 생애는 어째서 자기 파괴를 향한 한바탕의 소용돌이로 해석되는 걸까요? 그녀가 행한 모든 일은 그녀의 죽음을 거름망처럼 거쳐야 하죠. 로제 질베트 르콩트, 커트 코베인, 지미 헨드릭스, 리버 피닉스 모두 자살했지만, 우린 이들의 죽음을 극단으로 치달은 삶의 여파로 보잖아요. 하지만 재니스 조플린, 시몬 베유처럼 여자가 죽음을 택하면 죽음이 그 사람을 정의하게 되죠. 그 사람의 '문제'가 죽음의 원인이 되고요. 여자로 사는 건 여전히 전적으로 심리적인 작용 안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여자가 아무리 크고 냉철한 세계관을 지녀도 그 안에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담겨 있으면 다시 그녀에게로 초점이 맞춰지죠. 감정은 너무도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규율로, 형식으로 삼을 수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아요. 딕, 나는 세상을 그저 내 문제가 아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따라서 내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삼아야 하죠. 『아이 러브 딕』(309-310p) 23/11/07

18. 내가 실험 영화계의 페미니즘에 흥미를 잃은 건 따분한 자크 라캉 스터디 그룹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진실하게, 그러니까 한결같이 '미녀' 딜레마를 파고드는 경향 탓이기도 했어요. '추녀'인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죠. 그 문제는 결국 도나 해러웨이가 해결하지 않았던가요? 모든 여성 경험은 헛소리요, 완전히 허위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이보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말이에요. 『아이 러브 딕』(284-285p) 23/11/07

17. "당신은 아름답진 않은데 아주 지적이지." 영화 〈윈터 탠〉에서 멕시코 제비족이 서른여덟 살의 뉴욕 출신 유대인 여주인공에게 하는 말이에요. 물론 이 대사가 나올 때 우리는 그가 그녀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모든 섹스의 행위가 수모였어요. 당장 기억나는 대로 얘기해보면, 이스트 11번가, 머리 그로먼과 침대에 누웠을 때: "이 끝내주는 녀석을 숨 막힐 때까지 삼켜봐." 이스트 11번가, 게리 베커와 침대에 누웠을 때: "네 문제는 너무 천박하다는 거야." 이스트 11번가, 피터 바우만과 벽에 기대어: "너랑 할 땐 네가 창녀라고 생각해야 흥분이 된다니까." 2번 애비뉴, 부엌, 마이클 웨인라이트: "솔직히 난 좀 더 예쁘고 학벌 좋은 여자를 만나야지." 이 진지한 청년 여성(짧은 머리칼, 굽 낮은 신발, 조금 굽은 등, 지금껏 읽은 책들을 생각하느라 바쁜 머릿속)을 어떻게 대하나요? 때리고 따먹고 사내처럼 대하죠. 그 진지한 청년 여성은 어디서든 섹스의 기회를 찾았지만 손에 넣은 섹스는 결국 붕괴의 활동이 되었어요. 이 남자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녀가 증오를 불러일으킨 탓일까요? 그 진지한 청년 여성을 여인으로 만들기 위한 모종의 도전이었던 걸까요? 『아이 러브 딕』(279-280p) 23/11/07

16. 나는 과테말라 집단 학살이 내가 남편과 함께 써서 당신에게 건넨 180쪽의 사랑의 편지들, 그 시한폭탄이자 수채통이자 원고인 편지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설명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어떻게든 찾을 생각이었죠. 당신과 내가 아주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분화구의 가장자리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진실 그리고 곤경. 진실 그리고 섹스. 나는 떠들고 당신은 듣고 있었어요. 내가 미친 여자, 지적인 여자, 당신과 그 세대 전체가 비난하는 그런 여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당신은 목격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목격에는 공모가 담겨 있지 않나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군요." 호기심이 떨어지면 그들은 늘 이렇게 말하죠. 내가 당신에게 말했어요. "나는 지금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요. 미국에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가 우리의 삶뿐이라면 사례 연구를 해야 하지 않나요?" 『아이 러브 딕』(239p) 23/11/07

15. 당신은 이제 조그맣게 줄어들어 유리병 안에 들어가 있답니다. 휴대용 성자가 되었죠. 당신을 알고 지내는 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지내는 것 같아요. 우리는 무수히 많고 당신은 하나 뿐이니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되겠죠. 내 삶에 대한 답은 없어요. 다만 난 당신에게 감화되고 그저 믿음으로 만족한답니다. 사랑을 담아, 크리스가. 『아이 러브 딕』(156-157p) 23/11/07 23

14. 텔레파시가 통하듯, 언어의 깊숙한 내면, 우리 겉모습의 반대편에 진실로 구조화된 평행세계가 있고 갈라진 틈새로 그곳을 엿볼 수 있다고, 일순간에 불과할지라도, 그곳을 보거나 듣고 경험하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할 거라고. 찰나에 본 빛을 따라, 꿈에서 들린 음성을 좇아 평생을 살 거라고. 「자가 수술을 위한 구부러진 공간에서」, 『인생연구』(213p) 23/10/17 9 10

13. 실제의 그가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의 내게 현실은 오로지 그가 쓴 글과 그 글들이 관계 맺는 세상의 요소들, 매일 반복해서 듣는 노래와 웹을 떠돌아다니는 국적 불명의 영화들, 유명 작가들, 유명 비평가들, 오디션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스타들이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증오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궁금해 하는 모든 과정을 그는 눈부신 속도로 써내려갔다. 그와 매일 밤 섹스를 한다 해도 그가 내 의중을 이 정도로 알 수는 없었으리라. 실제로 그는 전혀 몰랐고 나는 그와 육체적으로 가까워질수록 정신적으로 멀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자가 수술을 위한 구부러진 공간에서」, 『인생연구』(210-211p) 23/10/17

12. 낸시는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으면 청바지 호주머니에서 자기 사진을 꺼내, 마치 자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필립 K.딕』(215p) 23/10/17

11. 「그런데 사장님 책상 밑에 뭔가 있어요.」 뭔가 있다고? 레오는 허리를 굽히고 책상 밑을 들여다본다. 아닌 게 아니라 뭔가가 그를 쳐다보고 있다. 뚜렷한 형태가 없는 어떤 것이다. 어둡고도 빈정거리는 듯한 어떤 것이다. 「음, 그렇군…….」 레오는 한숨을 내쉰다. 「퓨게이트 양, 추-Z의 출시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겠어. 왜냐하면 지금 난 누구에게도 말하고 있지 않으니까. 지금 난 엘드리치가 가둬 놓은 세계에 혼자 있는 거야.」 만일 그가 이 더러운 괴물을 보내 자기가 얼마나 철저히 나를 장악하고 있는지 보여 주지 않았다면, 난 끝없이 계속했겠지. 어떻게 나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이 가짜 우주 안에서 1세기는 살았을 거야. 『필립 K.딕』(188p) 23/10/17

10. 첫째, 나는 그렇게 끔찍한 것이 현실이 아닌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안도감을 주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고, 따라서 만일 박사님께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리 말씀하시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실패하셨어요. 둘째, 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주 잘 알고, 그런 것을 〈환각〉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그와 정반대죠. 박사님이 말씀하신 그 피로, 암페타민, 개인적 불행, 그리고 어쩌면 내밀한 심리 상태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을 여과하는 정신적 메커니즘이 내 안에서 작동을 멈춘 거예요. 현실을 가려서 그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던 스크린이 찢어진 거죠. 난 분명히 봤고, 지금 내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본 것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필립 K.딕』(171-172p) 23/10/17 9 14

9. 그것을 조용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실제 세계, 그러니까 외관의 세계 아래 숨어 있는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앤의 공방에는 그런 것이 없었지만 그의 책 속에는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책 전체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문학적 차원에서는 별 것 아니지만 신비스럽게도 우리를 진실에 이르게 하는 어떤 창조물 말이다. 그의 세계, 앤의 세계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갈수록 더해졌다. 이 책은 이 칠해진 화폭에서 조금 찢긴 부분이고, 이 구멍을 통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쪽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앤은 말할 것도 없고. 『필립 K.딕』(116p) 23/10/17 10 14

8. 가정적인 미래가 아닌, 가정적인 과거를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과거와 거기서 기인하는 현재가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존재할 수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뇌를 통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수많은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이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매 순간 수만 가지 사건이 도래할 수도 있고,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매 순간 변수들이 기지의 것들로 바뀌고, 가상이 현실로 바뀌며, 이렇게 매 순간 세계는 다른 상태를 나타낸다. 좀 더 소규모 차원에서 보자면, 작가는 무엇을 쓰는 이런 종류의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어떤 것은 일어나고, 또 어떤 것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결정은 바로 작가의 몫이다. 『필립 K.딕』(111p) 23/10/17 7

7. 내가 생각한 정웰링턴은 실제의 정웰링턴과 다른 세계에 있다. 나는 정웰링턴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던 생물학에 관심을 가질 거라 믿었다. 의사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사회생활을 위한 방패막일 뿐이다. 물리학과 생물학 분야에서 사고의 근본을 바꿀 변화가 진행 중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개념뿐 아니라 세계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정웰링턴이 죽은 뒤에 유전자의 자리바꿈 현상이 증명되고 후성유전학과 유전자 편집 기술 등 혁명적인 변화들이 생겼지만 소설 속에서 윌리와 안나, 이지는 모든 것에 대해 고민하고 대화를 나눌 자유가 있다. 실제 삶에서 시간이 그들을 속박했기에 소설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학에는 문학의 룰이 있고 시간은 언제나 우리를 제어한다. 나는 항상성과 돌연변이가 우연과 필연에 대한 논의를 거쳐 역사에 닿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이곳에서 정웰링턴은 죽지 않을 것이기에 생각 역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158p) 23/10/17 8

6. 버지니아 울프는 순차적이지 않은 기억과 생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인상들은 모든 방향에서 수없는 원자의 끊임없는 소나기로 내린다. 에이젠슈테인의 ‘구제의 책’은 앞과 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없다.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동시 접속하고 이동할 수 있는 책. 나는 하나의 글에서 곧장 다른 글로 넘어갈 수 있고 그것들의 상호 연결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적 형식을 만들고 싶다. 여러 생각들의 끊임없는 교체야말로 사유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혁명의 단두대야말로 사유 과정의 진정한 반영이다. 잘려 나간 머리통 안에서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교체되고 다시 머리통이 잘려 나가고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이념이 교체되고 다시 머리통이 잘려나가고…… 『모든 것은 영원했다』(150p) 23/10/17

5. 외항선이 그단스크에 정박했을 때 함께 탄 선원인 레슬리 웡은 브로츠와프에 갈 거라고, 다시 배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죽은 사람들이야. 브로츠와프에는 발레단이 있었고 그것은 레슬리 웡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는 웡에게 편지를 받았고 내용은 간략했다. 이곳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돈다. 사람들이 죽었고 그 수가 백만을 넘는데 누가 죽었는지 모른다. 수백만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죽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바로 옆에 살던 이웃이 죽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 못 한다.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더라. 사라진 이웃이 죽은 사람인가요? 웡이 물었지만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사라진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하지 못했다. 왜인지 알아? 웡은 스스로에게 물었고 대답했다. 이곳은 지옥이기 때문이야, 지옥에선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생각을 연결할 수는 없어, 생각을 연결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행동이기 때문이야. 『모든 것은 영원했다』(27p) 23/10/17 3

4. 이 책의 주제는 우선, 노동과 휴식의 정상적 연쇄에서 떨어져나온 이 밤들의 역사다. 불가능한 것이 준비되고 꿈꿔지고 이미 체험되는, 말하자면 정상적 사태 진행이 감지되기 어렵고 공격적이지 않게 중단되는 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사유의 특전을 누려온 이들에게 종속시키는 전래의 위계를 유예시키는 밤. 공부의 밤, 도취의 밤. 사도들의 말, 또는 인민의 교육자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배우고 꿈꾸고 토로하고 글을 쓰기 위해 연장된 버거운 나날들. 일출을 맞이하러 다 함께 들판으로 나가기로 예정된 아침들. 『프롤레타리아의 밤』(10-11p) 23/10/17

3. 김원은 미래학 세미나에서 서기 2000년 한국은 주 4일만 일하는 곳이 될 것이다, 4일은 사회를 위해, 3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하며 집은 자동차나 냉장고 캡슐로 만들어진 내구성 소재 정도로 변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지금 한국은 어떤가요, 주 4일 근무인가요, 라고 물었고 나는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최고 수준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정태순은 서울을 떠난지 40년이 넘었다며 마지막으로 한국에 들른 것은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 겨울로 종로에는 신신아케이드도 없고 파고다아케이드도 없고 세운상가만 있었는데 그 역시 허물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은 인천공항에서 내려 미니밴을 타고 자유로로 진입했는데 도로를 달리는 내내 흐렸던 겨울 하늘에서는 비가 퍼붓기 시작했고 냉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강변북로에 갇혀 몇 시간이고 한강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는데 만약 김수근 선생에게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여의도를 영원히 물에 잠기게 했을까요,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81p) 23/10/17 5

2. 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곤 합니다, 왜 미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고 한국관과 한국관을 만든 사람들이 이토록 다르며 만박과 만박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다른 것이지요, 저는 어디에도 피트하게 들어맞지 않는데 이것은 제게 장소보다 시간을 꿈꾸게 합니다, 기술을 찬양하는 것과 기술을 비판하는 것,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과 박람회를 분쇄하는 것, 국가에 동조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해 입는 것이며 그런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였지요, 라고 태순은 말하며 그녀가 보기에 양코 씨와 김원, 조영무는 모두 그러한 몸을 가진 사내들로 몸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저는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라고 말했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79p) 23/10/17

1. 정태순이 작품의 화자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다. 엑스포70 자료에서 한국관 멤버들의 단체 사진을 보는데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된 남자들 사이에 홀로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그녀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어떤 사람인지, 무슨 역할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지만 그곳에 없었다. 개발도상국의 예술가와 건축가,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늘 동조와 비판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내게 동조와 비판은 동일하게 느껴진다. 둘 모두 체제에 종속되어 있고 둘 모두 권력지향적이다.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미래에 대한 매혹과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할 순 없을까. 동조/비판의 시스템에서 소외된 관찰자, 내부의 소수자가 내는 목소리. 2018년 제16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정지돈 23/10/17

강희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책 속의 문장들을 경유합니다. 웹에 게재한 순서로 번호 붙여진 문장들 사이에서, 아직 발견되지 못한 관계성을 찾습니다. 따라서 이 모음집은 그저 텍스트들의 단순한 나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평행세계로 떠나는 모험의 연속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작업은 김동신 디자이너의 『인덱스카드 인덱스』 프로젝트로부터 영향받았습니다.